독후감_"실전! ERP 원가관리 - 개념이해부터 결산실무까지" (김대수 지음)
올해 초 원가 후임으로 올리려고 정성스럽게 가르치던 친구가 우리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빙그레 웃으며 도망간 이후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뭘 잘못한걸까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첫째로 사수가 저라는 게 제일 큰 문제였고(그저 이 인간이 싫다는 케이스), 둘째로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전해주려 했습니다. 상대방이 의지가 없다는 걸 외면하고요. 제가 어렸을 때 일을 배우면 신나던 생각만 하고 당장 후임이 처한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저와 시작점이 달라서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으니까, 굳이 저처럼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었거든요.
아무튼 덕분에 깨달음을 얻고 다음 후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고민을 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특히 후임이 제 마음을 알아줄 일은 더더욱 없지만요. 어쨌든 중요한 건 지식을 전해줄 땐 상대방이 받을 의지가 있는 것부터 줘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괴리가 생겼습니다. 내가 일을 할 때 필요한 배경지식은 이만큼인데, 정말 이걸 다 알아야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물론 알고 시작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훨씬 좋습니다만, 몰라도 시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무니까요.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일단 일을 시키면 이 친구가 질문을 하기 시작할텐데 그 질문의 질을 좀 높여보자! 이게 제 의도였습니다. "당장 어떻게 해요?" 수준의 일차원적인 질문이 아니라 "왜 이렇게 해야 해요?" 같은 질문은 해줘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았거든요. 그러려면 공부를 시킬만한 책이 필요했습니다.
원가회계에 대한 이론서를 몇 가지 찾아봤지만 학부생 시절에 접했던 딱 그 수준이었습니다. 이론적인 내용은 충분한데, 막상 실무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은 이론서에 나오질 않거든요. 하다못해 수불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이론서는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실무에서는 수불부와 제조원가명세서를 연결짓는 게 굉장히 필수적인 지식인데, 마땅한 교재가 없어서 도제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니 황당하지요. 이론과 실무를 연결하는 통찰이 생기려면 결국 경험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이 친구가 그 경험을 쌓기 전에 제가 먼저 지쳐서 그만둘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종류의 책을 더 찾아봤습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습니다.

"실전! ERP 원가관리 - 개념이해부터 결산실무까지" - 김대수 지음
"실전! ERP 원가관리 - 개념이해부터 결산실무까지"는 21년도에 처음 출판된 책입니다. 읽다가 문뜩 화가 났습니다. 저는 원가를 배우려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뭐가 뭔지도 몰라서 맨 땅에 머리 들이박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처음부터 이런 책을 만났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에 이 책을 만났으면 제 회계 인생이 좀 달라졌을까요? 장담할 수 있는 건 그 땐 절대 이런 책이 나올 수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ERP에 대한 이해도가 중요하다는 건 알면서도, 그 지식을 나눠주면 자기 밥벌이를 뺏기는 거란 생각들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ERP를 좀 안다는 과차장급 이상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소극적이었죠. 첫 직장에서 ERP 고도화 프로젝트에 보조로 투입되었을 때 이게 왜 이렇게 되요? 라는 질문에 답을 얻으려면 컨설턴트에게 정말 많이 굽신거려야 한 마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답을 원하면 바로 비용을 논해야 했고요. 그런데 일개 사원의 호기심을 해결하자고 회사가 돈을 쓰겠습니까? 어림도 없었죠. 이런 기조는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ERP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비싸게 팔립니다. 반면 회사는 실무자로부터 헐값에 사들이고 싶어하죠. 굉장히 괴씸합니다만, 이게 또 실무자의 비루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억울하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회계사가 되었어야 하는데...(학부생시절에 교수님이 슬픈 눈으로 강조해서 말씀하셨지만 당장 돈벌이가 급급했던 저는 그 말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시점에서라도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게 저는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물론 이 책을 한 번 읽었다고 ERP를 다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실무자로써 알아야 할 최소한의 흐름에는 접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대충 자기가 갈 길은 잡은 셈이거든요. 원가가 재미 없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답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회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영진이 말로는 뭐라뭐라 떠드는데, 막상 실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심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실무자 스스로 열정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얼만큼 알아야 하고, 또 얼만큼 알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최소한 이 회사에선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다른 어딘가에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기니까요.
이 책의 백미는 각 단락 끝마다 나오는 저자의 맺음말입니다. 원가회계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공감도가 다릅니다. 일단 원가를 처음 맡아서 시작할 때 한 번 읽어보고, 1년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책을 읽어보면 느낌이 새롭지 않을까 싶네요. 업무를 하는 중간에 용어를 찾기 위해 백과사전처럼 활용해도 좋겠습니다. 원가 담당자 뿐만 아니라 ERP의 대략적인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모든 회계 실무자에게 권장하고 싶고요. -끝-.